[ 북리뷰 ] <빛, 색깔, 공기 >를 읽고. . . '죽음의 귀로에서 바라보는 삶의 단상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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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 공감이야기

[ 북리뷰 ] <빛, 색깔, 공기 >를 읽고. . . '죽음의 귀로에서 바라보는 삶의 단상 '

by 매직파워 2020. 3. 18.

이 책은 저자의 아버지이신 김치영 목사님이 암선고를 받고 돌아가시기 전 4개월 동안 가족들이 겪고 느꼈던 것과 신앙인으로서 아버지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버지의 잦은 병환으로 힘들어할 때 목사님이읽어보라고 주신책이라 읽게되었다.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저자가 신학과 교수이고 투병을 하신 분이 목사님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에 관해 강단에서 설교하시고 강의하실 때와 본인이 현실로 그 문제앞에 직면했을 때 이 분들은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책장을 열자마자 저자 역시 이런 솔직한 고백으로 서두를 꺼냈다.
막상 현실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목회자 가정이다보니 신경쓰이는 주변의 시선 그리고 죽음을 앞에두고 느끼게되는 존재론적 고민들이 일기를 쓰듯 하루하루 기록되어있었다.

아버지와의 대화와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삶을 어떻게 바라볼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원리에 순종하는 모습 또한 이 책이 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저자인 김동건 교수님이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다 공개하면서 이 책을 발간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죽음을 더 통찰력있게 바라봤으면 하는게 아닌가 짐작해본다.
나는 2006년 판으로 읽었지만 검색해보니 2013년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장들에게 다소나마 견딜수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책의 가장 인상깊은 대목을 소개해본다.

이 책의 제목이 왜 <빛,색깔, 공기>인지에 대한 배경과 저자의 삶에 깊은 고찰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으로 그림을 좋아하셨던 저자의 아버지가 편찮으신 동안 특히 많이 보셨던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 그림에 대해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p112
..... 중략 ) 오늘 이 그림을 보면서 빛과 공기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았다. 터너는 공기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야.”
터너는 공기... 공기의 빛깔을 그렸어! 네 눈에는 하늘과 땅만 보이고,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지? 네 눈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물만 있고, 사물이 없는 곳은 빈 공간으로 보이지? 사람들은 공기를 잊었고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공기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니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 저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 비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것을 미학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빈 것과 없는 것은 다르죠?”

“물론... 공기는 비어있는(無) 것과 다르다. 터너는 하늘과 땅 사이를 꽉 채우고 있는 공기를 보았어. 이 공기에 빛이 부딪히자 공기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터너는 이것을 색깔로 표현한 것이지. 그는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는 공기의 빛깔, 그 빛을 그려냈다!”

“터너가 공기의 빛깔을 그렸다는 것은 놀랍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겠지요?”

“물론이다. 내가 터너를 위대하게 보는 것은 단순히 그의 그림 솜씨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최근에 아버지께서 터너의 그림을 즐겨 보시는 이유를 알았다. 일상의 평범한 햇빛, 흔한 풀잎들에 묻어있는 색깔, 항상 널려져 있는 공기, 우리들은 이들을 보지 못했고 잊고 살았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매일같이 삶의 ‘무의미성’과 마주하며 산다. 삶의 무의미성이 우리를 억누른다. 삶의 무의미성은 어두움의 힘이다. 태초에 신의 천지창조는 無에서 生(有)을 만드신 것이다. 이제 모든 피조체는 생명이 되었다. 흩날리는 한 줌 흙에 신의 입김이 닿자 인간은 살아 숨쉬는 생령(生靈)이 되었다. 신의 창조 행위는 허무의 힘을 이긴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자 흑암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왔다.

하지만 모든 피조체는 한계 속에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무화(無化) 시키는 힘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가 쉽게 극복되지 못해 당황한다. 마성화 된 힘이 우리를 짓누른다. 일상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 속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하루하루의 무의미성이 生을 갉아먹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이 우리 실존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 전율한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이 들어오고 어두움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生의 가장 짧은 순간도 어두움을 물리친다. 삶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生을 통해 살아있는 동안 매순간 의미를 찾는다. 허무의 힘과 겨루는 싸움은 매 순간 일어난다. 힘든 싸움이 계속되고, 때로는 어둠이 우리를 삼키지만... 우리는 태초에 ‘빛이 있으라!’ 외친 신의 음성이 우리 내부에서 울리는 것을 알아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허무의 힘에 대적해 싸우는 전투의 첫 행위이다. 이는 각 실존의 자기-창조의 몸짓이며, 신의 첫 창조 행위와 연결된다.

아버지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무엇인가 느끼고,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신 것 같다. 흔히 스쳐 지나가는 빛, 색깔, 공기마저도 새롭게 느끼셨다. 이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터너의 그림을 다시 이해하게 하신 것이다. 내가 언제쯤 평범한 햇살 하나, 색깔 하나, 공기 하나를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터너의 그림 중에서 누런빛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런 그림들이었다. “The Lake, Petworth”, “Sunsetting over a Lake”, 그리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표현이라 몇번씩 곱씹어보게 된 문장들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않다면 꽤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논리정도로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생명, 삶, 죽음 , 인간의 존재와 의미 그리고 이 우주의 신비가 창조주를 배제하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너무나 기가막힌 우연들이 난립하고 있는 세상속에 살고 있는 것이된다. 언제 어그러질지 모르는 우연들속에 불안함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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